불교는 고통의 소멸을 위한 진리를 찾는 수행을 한다. 정진한다고하는데 이는 바른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불교의 사성제 즉
고 : 고통
집 : 고통의 원인
멸 : 고통의 소멸
도 : 고통의 소멸에 대한 길
여기서 도 에 해당하는 것이 중도라 한다. 불교의 중도는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중도라는 것은 양 극단의 산술적인 중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이라고만 정의된다. 이 중도는 팔정도로 불리는데 정견,정어,정념,정정진,정선,정명,정업,정사유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이 구체적인 것들을 반드시 지켜야 고통을 소멸시킬수 있는 그런 답답한것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팔정도. 즉 바른길을 찾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의 중도는 다른사람들의 중도와 다르다. 그 사람들의 생각을 내가 무시할 이유는 없다. 나도 하나의 존재고 그들도 하나의 존재다. 진리라는 것은 어느 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맞는 것이 아닌 각자의 생각에 따른 진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진리와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를 동일한 차원에 놓고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항상 현재 모든 순간에 정성을 다 하고자 한다. 이것은 모든 순간에 명상, 참선을 하는 것이다. 꼭 가부좌를 하고 그때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순간에 정진을 하는 것이다. 걸을 때나, 밥 한알이라도 먹을 때, 씻을때 모든 순간에 정성을 다한다. 내가 책 한글자라도 보는 경우 그것을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내가 걸을 때에도 발걸음 하나하나, 그리고 내가 보는것도.. 단지 내눈 앞에 풍경이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풍경을 능동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재 이 순간에 가장 정성을 다 하게 되고 정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순간에 명상을 하는 것을 어떻게 실천하고자 하냐면, 몸을 항상 이완시킨다. 몸에 힘을 물리적으로 모두 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근심걱정을 줄이는 것이다. 그럼 몸에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반영되어 생각이 유연해 질 수 있다. 그 후에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고 바라본다. 이러면 대상에 대해 좀더 정성스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 예술작품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것인데.. 그물망 공부법에서 본 내용..즉 모든 지식은 이어져 있다. 모든 것을 예술작품 감상하듯이 감상하면 단기간엔 힘들 지라도 장기적으로는 훨씬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후에 엘랜 랭거의 '심리학의 관점에서 예술가가 되려면..'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내가 이 생각에 관심이 있어 저절로 그쪽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유연한 마음을 가지고 사건을 접근하면 창의성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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